덕수궁(德壽宮)

2014. 8. 20. 11:55浪·떠돌이

 

 

 

 

 

 

 

 

 

 

 

 

 

 

 

 

 

 

 

 

 

 

 

 

 

 

 

 

 

 

 

 

 

 

 

 

 

 

 

중화전(中和殿)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당(卽祚堂)이었는데,

고종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1902년 즉조당 앞에 새로 중층 건물을 지어 중화전이라 하였다.

 경운궁 중화전은 고종황제가 경운궁에 재위하는 동안 정전으로 사용하였던 건물로

, 광무 8년(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단층 전각으로 중건되었다.

 

중화문(中和門)

중화전과 함께 재건된 중화문은 경운궁의 중문이자 중화전의 정문이다.

당초에는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6년 중화전이 단층으로 축소 재건될 때 함께 단층으로 지어졌다.

전을 깐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앙열 세 칸에 모두 판문을 달았다.

 

준명당(浚明堂)

덕수궁(德壽宮)의 내전으로 사용된 건물이며 1897년에 건립되었다.

고종(高宗)이 창덕궁(昌德宮)에서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옮겨갈 때 지어졌으며

 1904년 덕수궁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건립되었다.

고종이 정무를 맡아 보던 편전이었으며 침전으로도 사용하였다.

또한 어린 덕혜옹주(德惠翁主)를 위해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관헌(靜觀軒)

1900년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연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덕수궁 안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회랑 건축물이다.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즉조당(卽阼堂)

즉조당일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으로 덕수궁(옛 경운궁)의 모태가 된 곳이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 한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 했다.

 인조 즉위 이후 서까래하나 바꾸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해 왔던 까닭이다.

 현재 즉조당에는 1904년 대화재이후 중건된 건물로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함녕전(咸寧殿)

1897년(건양 2)에 창건되었으나, 1904년(광무 8) 화재로 불탔다. 현재의 건물은 화재 직후에 중건된 것이다.

이 전각은 고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임금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준 후 잠시 수옥헌(漱玉軒)에서 거처하였으나,

순종창덕궁으로 옮긴 후 다시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여기에서 승하하였다.

 

덕홍전(德弘殿)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우측(동쪽)에 위치하며 편전(便殿)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함녕전과 나란히 남향으로 지어졌으며 정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1904년 덕수궁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경복궁과 창덕궁에 지어진 편전과는 다르게 거의 정방형을 갖추고 있는 독특한 모양이다.

 

석어당(昔御堂)

석어당은 궁궐 안에서 정전을 제외한 유일한 2층 건물로

 외래적인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재래식 민가 건물로서

정전인 중화전의 바로 뒤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후 선조가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 간 어소(御所)로 사용했던 곳이며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 앉혀 죄를 책한 곳이라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중건한 건물로서 가칠(假漆)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이름 나있다.

 

광명문(光明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의 정문이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八作)집으로

1904년(광무 8) 함녕전은 소실되고 이 문만 남았다.

 38년 미술관을 개관할 때 이 문을 흥천사(興天寺) 종과 누각(漏刻)을 진열하기 위하여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는데

공포는 2익공이며 겹처마에 단청을 칠했다.

 

석조전(石造殿)

기본 설계는 영국인 G.R.하딩,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 착공, 1909년 완공한 후 1919년까지 고종 황제의 정궁으로 사용했다.
3층 석조 건물,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당시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두산백과 사전 빌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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