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5. 18:56ㆍ仰·높은곳
-<천원권 지폐뒷면에 도안된 계상서당>-
만년에 퇴계 선생은 은퇴하여 종가 건너편에 조그만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많은 제자들이 입문하여 장소가 협소해지자 후에 도산서당으로 옮겼다 한다.
율곡 이이가 23세 때 당시 58세의 퇴계 이황을 만나서 3일간 머무르며,
학문과 시를 논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퇴계 선생은 강학(講學)하던 도산서원을 집인 계상(溪上)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때 상계(上溪)에서 도산서원을 다니면서 지은 시에
'계상(溪上)에서 산을 넘어 서당에 이르는 길을 걸으며' (步自 溪上 踰山 至書堂)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벼랑에 꽃이 피고 봄날은 고요한데 |
화발암애춘적적 (花發岩崖春寂寂) |
시내 숲에 새울고 냇물은 잔잔하네 |
조명간수수잔잔 (鳥鳴澗樹水潺潺) |
우연히 산 뒤에서 동자 관자 이끌고 |
우종산후휴동관 (偶從山後携童冠) |
한가로이 산 앞에 와 고반을 묻노라 |
한도산전문고반 (閒到山前問考槃) |
계상서당 옆으로는 퇴계 선생이 거처하였던 한서암이 보이는데
원래 한서암은 현 위치에서 개울 반대편에 위치하던 것을
찾아오는 후학들의 편리를 위하여 퇴계 선생이 현위치로 옮긴 것이다.
원래 한서암이 있던 자리에는 비석이 있어 옛 위치를 증명하고 있다.
한서암이 나이가 들어 고향을 찾아 편안한 여생을 위해 지은 집이라면
계상서당은 평생의 꿈이었던 후학 양성을 실현 시킨 곳이다.
-옮겨온 글-